楊氏(양씨)
양씨는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6본을 제외한 나머지 41본에 대하여는 미고이다. 양씨는 청주양씨와 중화양씨의 주종설이 양시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청주양씨의 세보에 의하면 시조 양기는 중국 원나라에서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1352년(공민왕 즉위)에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 세거 하면서 상당(청주의 고호)백에 봉해지고 그의 제6자 양포가 중화양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화양씨의 세보에 의하면 시조 양포는 고려 고종때 정스으로서 당악(중화의 고호)군에 봉해 졌으며 양포의 장자동무가 김방경장군의 휘하에서 진도 삼별초난을 토평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상고하여 보면 상당백이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한 연수 1352년 보다 82년 앞선 1270년(원종11)의 일인데 당악군이 상당백의 6자라 함은 어불성설이라 하고 오히려 상당백 양기가 당악군의 장자 동무의 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양씨튼 무두 동근동조라 생각하고 있는 바 후일 해명할 날이 올것으로 믿어지는 바이다.
南原楊氏(남원양씨)
시조 경문(敬文)은 고려때의 지영월군사로 그 이외의 사적과 선세계에 대에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누대 남원을 중심으로 토착한 사족인 까닭으로 남원을 본관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4(培배 墩돈 堪감) 15(公공) 16(洪홍 潤윤 泗사) 17(士사) 18(時시) 19(汝여) 20(擧거 華화) 21(基기 大대 世세) 22(鎭진 泰태 應응) 23(德덕 重중 숙) 24(根근 秀수 宗종) 25(煥환 燁엽 壽수) 26(在재) 27(錫석) 28(泳영 洙수) 29(秉병 東동 相상) 30(燮섭 萬만 熙희) 31(埈준 圭규 旭욱) 32(鏞용 鉉현)
密陽楊氏(밀양양씨)
시조 根(근)은 청주양씨의 시조인 起(기)(대광보국숭록대부상당백충헌공)의 후예이다. 그는 고려말에 밀성(밀양의 고호)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은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행 렬 자>
16(期기) 17(春춘) 18(王왕) 19(漢한) 20(彬빈) 21(雨우)
安岳楊氏(안악양씨)
시조 萬壽(만수)는 고려때에 전서를 지냈고 공이 많아 안악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청주양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안악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中和楊氏(중화양씨)
시조 浦(포)는 고려 고종때 정승을 지냈으며 당악(중화의 고호)군에 봉해 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중화로 하였다. 일설에는 원나라의 도첨의정승으로 고려 충선왕때 제국공주를 배행해 와서 대광숭록대부가 되고 상당백에 봉해진 양기의 제6자가 중화 양씨의 시조포라고 하지만 사실에 비추어 잘못이다. 묘소는 평남 중화군 정면 양지리에 있다.
<행 렬 자>
(기1)
22(東동) 23(在재) 24(漢한) 25(根근) 26(烈열)
(기2)
20(樂락) 21(夢몽) 22(時시) 23(俊준) 24(海해) 25(瑾근)
(기3)
20(澤택) 21(秉병) 22(熙희) 23(基기) 24(鎭진) 25(濟제) 26(集집) 27(勳훈) 28(均균)
淸州楊氏(청주양씨)
양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숙우의 후손 백교가 진나라에서 주나라로가 양후에 봉해짐으로써 나라이름으로 인하여 양씨가 되었다고 한다. 청주 양씨의 시조 기는 그 후손으로서 중국 원나라때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1351년(공민왕 즉위) 노국대장 공주를 배종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정착세거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동여 기마, 저포, 능견 등 사대공물을 영견케 한 공으로 삼한창국공신상당백을 특배 받았고 청주 관적을 하사 받았다.
<행 렬 자>
21(致치) 22(錫석) 23(澈철) 24(植식) 25(熙희) 26(周주) 27(鎭진) 28(洙수) 29(柄병) 30(榮영)
通州楊氏(통주양씨)
시조 복길(자, 상보)은 중국 통주 사람이다. 명나라 9의사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를 배행하고 와서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귀화하여 정착 세거했다. 후손들은 원향인 통주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